[평론]권력자여, 자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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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권력자여, 자제하라!

고성인터넷뉴스  | 입력 2008-12-26  | 수정 2008-12-26 오전 9:20:34  | 관련기사 건

올해는 유독 청계천을 자주 보았다. 청계천은, 고백하자면, 볼 때마다 두렵고 쓸쓸하다. 괴이한 그 인공의 구조물(혹자는 `누워 있는 분수`라고도 하고 `긴 어항`이라고도 하는!)을 안쓰러워하며 걸어본 날도 있고, `생태하천` 운운하는 슬로건이 휘날릴 때의 미사여구들이 떠올라 씁쓸한 날도 있었다.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도심 속 자연`이란 게 고작 저 정도 수준으로 몰락하고 만 것인지. 저것을 `자연`이라 오해하는 아이들이 있을까 봐 염려되기도 한다. 조경석과 콘크리트로 싸발라진 저 수준이면 청계천은 이중으로 복개된 셈. 도대체 내(川)는 어디 있지? 땅길, 물길, 바람길이 모세혈관처럼 얽히고 숨 쉬며 흘러흘러 순환하는 생명줄은?

 

청계천을 보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T. S. 엘리엇의 《황무지》의 프롤로그가 떠오르곤 했다.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다. "나는 죽고 싶어."

태양신 아폴론의 총애를 받던 쿠마의 무녀 시빌에게 어느날 아폴론은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시빌은 먼지 한 줌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먼지알만큼 많은 삶을 내게 주십시오." 삶에 대한 욕망만 알았을 뿐 `삶의 질`에 대한 지혜를 갖지 못했던 시빌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지만 젊음을 함께 갖지 못했다. 늙어 점점 오그라들어 새처럼 조롱 속에 매달린 무녀는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기를 원한다.

 

`복원`이 아니라 괴이한 방식으로 또 한번 `복개`된 청계천을 보며 철옹성 같은 석관 아래 짓눌린 청계천이 답답해 차라리 죽고 싶어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되는 건 나만의 지나친 자의식일까?

 

생명을 생명답지 못한 방식으로 감금하는 시스템은 생명에게 자살욕망을 촉발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삼라만상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연스러운 품위를 유지하고자 하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격려한다. 스스로 자기 존엄을 지켜가려는 의지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우리는 왜 모를까.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433행의 장시 《황무지》에 붙여진 무수한 문학적 헌사가 있지만, 내게 《황무지》는 어떤 거대한 흐느낌이다. 동서양의 신화, 고전, 걸작들이 뒤섞인 이 모호한 말의 성채는 모호함 속에 명확한 분노를 가지고 있다.

 

뜨겁게 탄식하는 순례자의 목소리가 미열에 들떠 간구하는 지혜는 아프고 참담하다. 도시도 안개도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생명의 기운들도 모두 흐느낀다.

 

현실감이 없는 도시,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밑으로

한 떼의 사람들이 런던교 위로 흘러갔다, 저렇게 많이,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음이 망쳤다고 나는 생각도 못했다.

때로 짤막한 한숨이 터져 나오고,

각자 자기 발 앞에 시선을 집중하고 간다.

 

― 1장 〈주검의 매장〉 부분

엘리엇이 그려 보이는 `현대의 마음`은 피폐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지만, 황무지의 마음은 죽음을 통과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어디로? 어떻게?

 

나는 강가에 앉아

낚시질을 한다. 등 뒤로 메마른 벌판

최소한 내 땅만이라도 바로잡아 볼까?

런던 다리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무너진다.

"그리고 그는 정화의 불길 속에 몸을 감추었다"

"언제 나는 제비처럼 될 것인가"―오 제비여 제비여

"폐허의 탑 속에 든 아퀴테느 왕자"

이 단편들로 나는 내 폐허를 지탱해왔다.

그러면 당신 말씀대로 합시다. 히에로니모는 다시 미쳤다.

주라. 공감하라. 자제하라.

샨티 샨티 샨티

 

― 5장 〈천둥이 한 말〉 마지막 연

원래 800행이었다는 시를 에즈러 파운드가 반토막으로 잘라냈다는데, 원래의 시가 어땠을지 나는 가끔 궁금하다. 지금보다 더 모호한 웅성거림, 난마처럼 얽힌 흐느낌으로 가득했을 천공지성(天空之城)을 상상한다. 그것대로 만끽할 만했으리라.

 

동서양의 너무나 많은 고전 텍스트가 뒤섞인 《황무지》가 기념비적인 절창이라는 생각을 솔직히 나는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황무지》에는 한 인간, 한 시인으로서의 엘리엇의 고뇌가 몸서리치게 배어 있다.

 

영감 가득한 한 시인의 지적 노동이 우리 마음을 두드리며 어떤 모호하고도 뜨거운 열기를 지펴가는 신비하고 역동적인 루트. 진정한 모더니즘은 형식과 언어에 사로잡힌 얄팍한 제스처가 아닌 것이다. 진짜들은 언제나 통째다.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변주되는 죽음과 부활의 기미 속에 순례자가 다다른 궁극이 나를 뒤흔든다. 격렬한 지적 노동 끝에 펼쳐지는 `시적 예지`. 엘리엇이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를 인용하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 나는 문득 사무친다.

 

창조주 프라자파티가 제자인 신, 인간, 악마를 교육했다. 그후 세 제자들이 의미있는 생을 이끌기 위해 어떤 미덕을 갖추어야 할지 프라자파티에게 물었다. 프라자파티가 신에게 말한다, 자제하라! 인간에게 말한다, 주라! 악마에게 말한다, 공감하라!

 

인간 속에는 신과 악마가 모두 들어 있다. 프라자파티가 권하는 미덕들을 인류가 진지하게 실천하지 못한다면 황무지는 부활의 기미를 영영 지니지 못한 채 다만 황무지로 버려질 것임을 순례자는 전한다.

 

물질과 돈, 파괴에 혈안이 되어버린 세상을 향해 순례자는 흐느낀다. 황무지를 구원할 천둥의 말씀을 들으라고. 우리는 타인에게 더 많은 것을 주어야 한다. 교만한 나를 내려놓고 타자와 소통하고 공감해야 한다. 물질에 대한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한 유한한 별인 지구는 날로 황폐화될 것이다.

 

더 이상은 인간의 죄를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도래할 것이니, 주검에서 어떻게 새로운 싹을 틔울 것인가. 말씀이 떠돈다. 흐느끼며 배회한다. 주라! 공감하라! 자제하라!

 

《황무지》의 순례는 《우파니샤드》의 진언을 세번 외우며 끝난다. "샨티, 샨티, 샨티." `이해를 초월한 평화`인 ‘샨티’는 수동적 평화가 아니다. `샨티`는 삼라만상을 존중하고, 나와 다른 모든 존재와 공감을 나누며, 스스로 겸손해진 자가 누릴 수 있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평화이다.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공동체를 존중하는 평화. 차이와 다양성이 공존하는 평화. 샨티… 샨티… 샨티… 마음속에서 이 말을 중얼거릴 때 나는 고요해지고 벅차오른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고요한 평화를 자꾸 훼방한다.

 

강물은 땀을 흘린다.

기름과 타르

짐배는 둥실

썰물에 뜨고

붉은 돛은

활짝

바람결 따라 육중한 돛대에서 펄럭인다.

 

― 3장 〈불의 설교〉 부분

음울한 묵시록이 여전히 우리 앞에 펼쳐진다. 급속한 도시화, 최고조에 달한 템즈강의 오염, 인간 마음의 황폐화가 끔찍하게 진행되는 자본주의, 지상의 모든 것이 자본 투기의 대상이 되고 독점자본의 폭력이 난무하는 황무지. 90년 전 엘리엇은 절규한다.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

오 주여 당신은 나를 끄집어내시라.

 

― 3장 〈불의 설교〉 부분

오, 누군가 있어 우리를 절망으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다면! 엘리엇은 순례자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다시금 템즈강 가에 앉아 낚시를 던지며, 주라! 공감하라! 자제하라! 천둥의 말을 우리에게 전하지만, `기름과 타르가 떠다니고 강물이 땀 흘리는 가운데 짐배가 떠다니는` 황무지의 풍경이 우리에게도 언제 닥쳐올지 모른다.

 

쿠마의 무녀를 떠오르게 하는 청계천을 만들어놓은 분이 대운하마저 강행할까 봐 두렵고 두렵다.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정비사업을 발표한 후 여당대표와의 모임에서 오갔다는 얘기를 들으며 몸서리친다.

 

"전광석화처럼 착수해 질풍노도처럼 밀어붙이라" "동시다발로 착수, 전국토가 거대한 공사 현장처럼 느껴지게 해야 하고" "전국 곳곳에서 건설의 망치소리가 들리게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는 이야기.

 

별안간 등장한 4대강 정비사업이란 게 생뚱맞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 사업이 자연스러운 물길을 직선으로 바꾸고, 바닥을 파고, 강둑에 콘크리트를 바르는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살아 있는 강을 석관 속에 싸매 죽이는 방식이 아니기를. 슬그머니 한반도 대운하로 연결되는 일은 더더욱 없기를. 90년 전의 엘리엇이 발견한 《우파니샤드》의 전언을 되 뇌인다. 주라! 공감하라! 오, 권력자여, 자제하라! <창비주간논평>

 

저자 소개

김선우 / 시인

1970년 강원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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